[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76화)] 성공의 비결’
우리 모두는 성공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삶에는 성공 보다는 실망과 좌절의 스토리가 더 많다.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판단한다는 논리로 시작된 ‘상대적 비교’는 스스로를 더욱 빈곤과 상심의 깊은 우울로 빠뜨리곤 한다. 오늘은 모세의 이야기에서 성공의 비결을 찾아 보려고 한다.
1. 실패하는 탈무드의 리더
이집트에서 시작한 모세의 사명은 처음엔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했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적을 베풀게 했고 형 아론이 말이 어눌한 자신을 대신해 말하게 했다. 모세가 놀라운 이적을 행하자 백성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계속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 모세가 처음 바로 앞에 나타난 때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다. 신과 같은 위치의 바로는 하나님을 순순히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 보내달라는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바로는 히브리 백성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매일 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어 내야 했고, 지푸라기도 스스로 모아야 했다.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에게서 등을 돌렸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75화)] 최고의 성취
창세기의 첫 도입부의 이야기는 두가지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하나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이고, 다음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두 가지 다 특별한 종류의 실패에 관한 것이다.
1. 실패의 역사
첫번 째 사건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이야기이다. 먹지말라한 열매를 따먹고,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만이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디 있느냐?’고 찾을 때 그들은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대답하고,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묻자, 아담은 이브가 먹게 했다고 핑계를 댔고 이브는 뱀이 꼬여서 먹었다고 남 탓을 했다. 둘 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남 때문에 먹게 된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큰 죄로 여기고 벌로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 내었다.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고 ‘나는 아니다’라고 한 것에 대한 벌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74화)] 반전의 리더
며칠 전 서울 이태원에서 할로인으로 십수만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젊은 청년들이 156명이나 압사로 생명을 잃는 끔찍한 사건이 생겼다. 그 중엔 여성이 약80%가 되고, 대부분이 10-20 대 라고 한다. 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대통령과 장관을 비롯한 주무처 관리들은 사건을 규명하고 보고하느라 매스컴에 등장하고, 어린 자녀들의 죽음에 안타까운 국민은 그들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 세운다. 북한이 울릉도 부근에 전후 처음으로 NLL을 넘어 미사일을 쏘았다.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한 위기의 순간이 되었다.
1. 예측된 리더
토라의 첫 책인 창세기의 후반부는 거의 성경의 위대한 리더인 요셉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그는 항상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고 그의 꿈과 상황의 극적인 변화는 온통 그가 원초적 리더로서의 정해진 방향성으로 가는 것에 어느 독자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에서는 요셉을 예수의 예표라고까지 인정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요셉의 후손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족속은 BCE722년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그들의 종적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반면에 전혀 예상치 않았던 유다의 후손인 다윗이 왕이 되면서 그의 후손은 계속 왕위를 이어가는 왕족이 된다. 유다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사람이다. 막내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창37:26-27) 했던 장본인이 바로 유다 였다.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에서 살다가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그의 아들들이 죄를 지어 두명이나 죽게 되고, 나중에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게한 인물이다. 유다는 이방 친구를 사귀고 그를 따라 “형제들을 떠나 내려갔다”(38:1)고 한 것의 ‘내려갔다’는 말을 주석가들은 그의 도덕성이 주저 앉은 강력한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이 정도면 리더 얘기는 입에 담지도 못할 형편의 인물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73화)] 야곱의 ‘색다른 평가’
야곱을 흔히 약싹 빠르고, 거짓과 술수에 능한 세속적 인물이라고 판단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야곱을 평가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그는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팥죽 한그릇으로 형의 마음을 빼앗고, 엄마인 리브가와 공모하여 에서인척 변장을 해 아버지 이삭을 속여, 대신 축복을 받고 외삼촌이 사는 먼 곳으로 도망을 친 인물이므로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
1.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하지만 그는 누가 진정한 유대인의 아버지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아브라함과 이삭, 심지어 모세도 얻지 못한 색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 스스로 “우리는 야곱의 회중” “이스라엘의 자녀”라고 자부심을 내재한 칭호로 부른다는 점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태동되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끄집어 내지도 않았고 민족에게 토라를 갖다 준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쉬마엘과 에서와 같은 아들을 배출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달리, 그의 자녀들이 모두 신앙 안에 머물렀고 그는 성공적인 삶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72화)] ‘소통 부재의 대가’
다소 예상치 않게, 유명 랍비인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그다지 가깝게 소통하며 지낸 것 같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들의 관계가 아브라함과 사라, 또는 야곱과 라헬 부부와 같지 않았고, 그들은 문제가 있을 때 서슴없이 대화를 나눴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네치브는 리브가가 처음 이삭을 만날 때의 장면이 광야에서 오후에 묵상하는 모습이었고 리브가는 베일을 쓰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장면에 대해서, 리브가는 스스로 두려움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의 아내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공포심은 이때로부터 그녀의 마음에 고정되었다고 보았다.
1. 이삭과 리브가의 소통의 부재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는 편하거나 솔직하고 소통적이지 못했다. 이런 소통의 부재는 연속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리브가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날 때 ‘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창25:23)’고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삭에게는 결코 알리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리브가가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했고 야곱을 에서 보다 더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했다. 만약 이삭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에서를 선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몇년이 지난 후에,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는 것을 듣고는 속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야곱에게 에서인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왜 그녀는 이삭에게 이삭이 바로 축복 받게 되어있는 아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을까? 말하지 않은 것으로 아이들이 자라는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을 이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71화) ] ‘로쉬 하샤나’ 신년의 역설
지난 월요일, 유대인의 신년(5783년)이 시작 되었다. ‘로쉬 하샤나’로 불리는 신년은 또한 ‘욤 하민’이라고도 불리는 데 이 뜻은 ‘심판의 날’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새해가 사과나 석류와 같은 과일들을 꿀에 찍어 먹는데, 풍성하고도 즐거운 한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 때, 이들이 읽는 토라 포션은 ‘회개’에 관한 것이다(신명기 29, 30장). 이들은 풍성하고 달콤한 한 해를 맞이 하기 위해서 열흘 동안 쓴디 쓴 회개의 시간을보내야, 생명책에 기록 된다는 ‘대 속죄일’을 맞이하는 아이러니한 절기를 수 천년동안 맞이하고 있다. 이 역설의 절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대표적 현자라고 불리는 마이모니데스와 나흐마니데스는 상당히 다른 가르침을 말하고 있어 더욱 회개의 의미를 깊이 발견하게 한다.
1. 마이모니데스
마이모니데스는 토라에는 부정정인 것과 긍정적인 교훈의 양면이 담겨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일부러 또는 모르고 죄를 범했을 때는 민수기4:6-7절에 있는 것 처럼, “ 그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고백한다(confess in words)’는 말은 입으로 말한다는 의미이고 계명의 긍정적인 측면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내가 심각한 죄를 범했고 간청합니다. 주여, 저는 괴퍅스럽게 행동했고 주께 범죄 한것을 회개하며 수치스러움을 후회하며 다시는 이런일을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이 회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가르쳤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70화)] ‘원수 갚지 마라 ’
우리가 즐기는 홍콩 영화나 서부 영화의 주제는 대체로 ‘원수’ 갚는 일이다. 사람들은 원수를 갚고 복수하는 데 희열을 느끼고 의당 그런 결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흥행의 중요 요소 이기도 하다. ‘복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원한을 속 시원히 푸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하지만,
1. ‘복수하지 말라’
성경에서는 ‘복수’를 분명한 어조로 금하고 있다. 레위기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또한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큰 계명이 뭐냐고 물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8-41)” 고 가장 큰 계명으로 소개한 성경의 핵심 구절이기도하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69화)] 역사, 기억 그리고 정체성
20세기 말 구 소련이 붕괴되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 시대가 끝나갈 때, 전 세계는 서구가 공유해 왔던 윤리가 이데올로기로 인해 상실되는 불안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결집된 윤리없는 사회는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개인주의는 점점 강해지고 사람들은 더 이상 공공의 선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았다. 공동체적 책임감은 뒷전이 되고 공공의 삶을 보호하는 힘의 결집엔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
1. 현대 유대인의 정체성
구 소련 지역에 살던 현대 유대인 철학자들은 전체주의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몸서리치게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 부터의 탈출은 고대 이집트로부터의 출애굽과 같은 개인적 기억을 갖게 하였다. 유대교는 노예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여정에 태동된 종교이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 자녀들이 유월절과 그들이 먹는 절기 음식을 통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 유대인의 현자라 불리는 이사야 벌린 경은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68화)] 자유를 위한 신의 역설
모세의 시대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았었다. 극심한 노역을 강요하고 히브리인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태어나는 갓난 남아를 모두 강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을 내려 대량 학살을 시행하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시점에 모세는 아무일도 일어 나지 않았던 듯,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사람들의 환대에 빚을 진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
모세는 한편 출애굽을 하며,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고 무교병을 먹으며 이것을 기억하여 미래 세대에 잊지않고 전해지도록 하기 위한 내재된 메시지를 전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를 향해가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전하는 ‘이집트 사람들을 미워 하지 말라’는 앞 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67화) ‘자기 자신을 위한 토라를 쓰라‘
12세기의 추앙 받는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토라에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명기 31:19)”고 한 모세의 말을 기초로 ‘모든 이스라엘 남성은 자신 스스로의 토라 두루마리를 써야한다’ 고 강조했다. 가령 부모로부터 토라 두루마리를 유산으로 받았다 하더라도, 마치 시내산에서 직접 토라를 받은 것처럼 자신의 것으로 써야 한다는 뜻이다. 모세는 여러 율법 가운데 이 조항을 마지막 것으로 남겼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해야할 각별한 지침이었기 때문이다.
1. 모세의 마지막 율법
이는 특별히 후진들과 미래 세대들에게, 조상이 이미 시내산으로부터 토라를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매 세대마다 새로 받고 더욱 새롭게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슬람의 쿠란은 유대인을 ‘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탈무드는 유대교 전체는 사람과 책이, 곧 유대인들과 토라 사이의 확장된 사랑 이야기 라고 간주한다. 유대인은 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민족이다. 읽고, 연구하고 논쟁하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마치 토라가 왕인 것처럼 여겨 왔다. 장막절 바로 후의 심캇 토라 때 유대인들은 두루마리가 마치, 신부인 것처럼 회당 안에서 시작해서 춤을 추며 회당 뜰에 나가 오랜 시간 두루마리와 함께 둥글게 돌며 춤추고, 그 이후엔 음식을 나누며 명절처럼 이날을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66화)] 율법과 사랑.. 하나님의 청사진
윤리적 관념에 엄격한 토라는 수 많은 율법의 규정으로 삶이 경직되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일상이 되지 않을까하는 중압감을 갖게 한다. 하지만 탈무드는 세상의 시각과 달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사랑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그것이 신명기서에 담겨 있는 윤리의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1. 사랑의 하나님
“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신명기7:12-13)”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 ( 65화)] 패역한 아들의 죄와 정의
자식은 어느 부모에게나 소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애지 중지 키우는 아들이 패악한 경우, 탈무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엄격한 체벌 기준을 세워 두고 있다. 이는 현자들 사이에 율법의 원리와 적용 방식에 대해 상당한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그 안에는 율법에 대한 신의 의도와 사랑하는 아들의 죄라는 미묘한 관계 속에 어떤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담겼다. 문제의 율법은 신명기에 담긴 다음의 구절들이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신 21: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신 21: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명기21:18-21)”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64화)] ‘자유와 선택‘
이스라엘 백성과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지낸 모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세대들에게 토라의 여러 곳에서 ‘자유와 선택 ’의 원리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신명기11:26-27)”
“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명기30:15,19)
1. 자유 의지
이런 모세의 지침에 대해서, 마이모니데스는 이 두 구절이 우리의 신앙에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증거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는 정치적인 선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개인과 국가적 선택의 연관성은 만약 사람이 자유롭다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탈무드는 신명기서가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63화)] ‘역설의 정체성’
토라의 시작, 창세기에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이스라엘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 여러번 등장한다. 출애굽기 초반에도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말하고, 솔로몬도 선택된 백성은 위대하고 셀수 없는 숫자가 될 것이라고 노래했다. 선지자 호세아도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다.
1. 역설의 정체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신명기 7: 7절에 “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라고 새로운 땅으로 진입하는 국가적 아젠다를 앞에 둔 민족에게 ‘역설의 정체성’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익숙하게 들어오던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혈기 왕성하고 사기 충천한 새로운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가장 작은 민족’이라는 말은 적잖이 의아함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이에대해, 탈무드는 여러 의견들을 개진하고 있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62화)] ‘차이나는 클라스’
지난 주에 이어, 토라의 대표 정신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쉐마-들으라’ 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폴란드의 대대로 유명한 랍비 가문의 후손인 야곱 라이너는 선조의 뒤를 이어 ‘야곱의 집’이라는 주석을 썼는데, 그가 성전 패망의 애도일에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 사람의 관점에서는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정확한 지식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 듣는 것이 더 큰 힘이 있다. 보는 것은 형체의 외부를 인식하지만, 듣는 것은 내면의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 이스라엘이여 잠잠하여 들으라(신명기27:6) “는 것을 상기시킨다고 설교했다.
그는 “ 하나님은 결코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지만, 들을 수 있고, 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친밀감과 변환을 경험하고 ‘차이나는 클라스’의 인생을 살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61화)] 오해와 이해 사이 – ‘율법’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수고를 한다고 판단하지만 이들의 전통적인 생각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양편의 얘기를 들어봐야 재판관이 제대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많은 것을 판단하지만 상대편의 검증된 정보없이 관습적인 오해로 편견을 갖곤 한다. 그 오해의 이유는 상대편의 입장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 토라의 원래 의미
탈무드는 ‘토라는 근본적으로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라고 정의 한다. ‘이는 사회의 구속에 관한 것이고, 개인의 존엄성과 생명의 존귀성과 정의와 긍휼을 소중한 사회적 가치 질서로 세우는 것에 있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이는 시편처럼 인간의 현실적 삶에 관한 것이지 영혼의 내적 삶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 (60화)] ‘가까이 있는 영광’
세기를 거슬러 자유를 표방하는 레게와 랩 등의 저항 정신을 담은 노래와 문화가 주목 받고 있다. 바야흐로 다양한 문화가 함께 공존하고 교류가 활발한 시대를 살고 있다. 60년대부터 시작해서 유대인들은 다른 종교와 문화 가운데로 향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대교는 신비주의와 묵상가들과 시인과 철학자, 또 경건한 남녀 수도자들과 비져너리와 선지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영적 각성과 갈망은 한편 거리감이 있고 타국적이며 또한 비 친밀감이 내재하고 있었다. 흔히 그렇듯, 가깝기 보다는 먼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1. 유대인의 시행착오
탈무드는, 다음과 같이 모세가 일찌감치 이런 성향을 감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명기30:12-14)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58화)] ‘어떤 리더십? ’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한 모세는 지척인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광야에서 40여년의 세월을 백성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역할을 다하고 나이가 들어 다음 세대인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을 이양한다. 토라는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신명기31:7).” 고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전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전임 리더로부터 조언과 축복을 받은 여호수아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도 명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신명기31:23)”하고 축복하였다. 겉으로 볼 때는 동일한 명령을 받은 것 같지만, 탈무드는 이 두가지 명령에서 미묘한 차잇점을 구분해 내고 있다.
1. 미묘한 차이
모세는 여호수아를 축복할 때 ‘tavo’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뜻은 영어로는 ‘go with’로, 한글로는 ‘백성을 거느리고’로 번역되었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쓴 ‘tavi’는 ‘bring’, ‘인도하고’로 번역되어 있다. 이 단어들은 비슷한 의미를 전달하지만 이에 대해 랍비들은 이 안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랍비 라쉬는 이 말은 완전히 다른 두가지 리더십 유형을 설명한다고 강조한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57화)] ‘외톨이 민족’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의 행보가 전반부에 시내산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반부는 모압 땅에서의 행적이 조명되고 있다. 민수기 22장의 후반부에 이르며 등장하는 한 모압 왕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발락’이다. 발락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소문을 듣고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까 두려운 나머지 한 이교도 선지자, 발람을 부르고 높은 곳에 올라가 이스라엘의 행태를 살펴 보고 그들을 저주해 자신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되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1. 이교도 선지자 발람의 증언
그러자 발람 선지자는 기대치 않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주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민수기23:9) “
간절한 저주를 바랐던 모압왕 발락에게 이교도 선지자 발람은 “이라엘백성은 많은 민족들과 같지 않고 혼자서 사는 외톨이 백성이며 그들을 저주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이다. 선지자 발람의 예언처럼, 이들은 국가의 법으로도 다스려 지지 않고 역사에서도 비껴가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동경을 하거나 또는 비판을 받는 독특한 민족으로 살아왔다. 비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분노나 미움을 유발하는 원천이 되곤하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유럽의 기독 국가에서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부랑아’ 취급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동조 하였지만 유대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56화)] ‘이상한 법- 살인자를 위한 도피성’
토라의 네번째 책인 민수기에는 ‘도피성’이 등장한다. ‘도피성’은 의도치 않았지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도피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곳이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여섯 도시에 세워졌다. 법이 구체화되지 않은 고대에는 가족들과 동네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스스로 법을 집행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이런 일들은 자칫 책에서도 보듯이, 가문이나 공동체의 끊임없는 복수와 연속된 피의 보복으로 점철되기 일쑤이다. 실제 가족이나 친구간에 의도 없이 사고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면, 원래 원수가 아니었더라도 피해자의 가족이나 형제는 가해자에게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악감정을 지우기는 힘들 것이다.
1. 도피성의 이유
도피성의 설치 이유는 그런 반복된 피의 보복을 방지하는 것이 긍극적인 이유이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살인을 범한 사람들이 도피성에 보내졌고, 그 곳에 있는 한, 법에 의해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그 법에는 조금 의아한 단서가 달려 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라는 조건이다. 대제사장은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특히나 존경 받는 법의 수호자인데, 그런 높은 지위의 인물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 구절이다. 탈무드는 이에 대해 다음의 세개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55화)] ‘생명책’과 ‘대 속죄일’의 기원
유대인의 절기는 거의 출애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월절과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장막절 등이 모두 출애굽을 하며 광야에서, 산에서 시작된 절기들이다. 그 중 대 속죄일은 죄에 대해 속죄를 받고 생명책에 기록되는 날로 일년 중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이는 날이다.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는 날인 만큼 죄에 대한 절실함이 남다른 절기이다. 이 날의 기원은 또한 다른 여러 절기를 탄생하게 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임재와 절기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당도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목도했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국민이 신의 임재를 보고 하늘과 땅의 창조주가 이들과 언약을 맺은 날이다. 모세는 산에 올라 4 0일을 지내며 신으로부터 직접 십계명과 율법의 구체적인 규정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신의 현현과 직접 음성을 들려 준 이 사건을 시작으로 매해 ‘오순절’을 지킨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확연한 사건으로 세대를 거쳐 말씀하시는 신을 기념한다.
또 다른 절기는 ‘나팔절’과 ‘대 속죄일’이다. 나팔절은 흔히, 로쉬 하샤나로 불리는 신년이고 성스러운 산에 신의 영광이 나팔 소리와 안개 속에 임하고 제사장의 나라로서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로부터 십일째 되는 날이 ‘대속죄 일’이고 사람들과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백성은 비로소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을 기념한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54화)] 선택과 결정.. “뭣이 중헌디?”
개인과 가정, 기업과 국가도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후 약속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40여년을 떠 돌아야하는 험난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사실 40년 이라는 시간은 한 세대의 전 인생이 담긴 세월이므로 많은 기성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 해야 했다. 자칫 광야에서 죽으려고 애굽을 도망나오는 생 고생을 해야 했는가하는 질문을 했을 법하다. 이들의 광야 생활은 일개 부족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로의 구조적 변환이 일어나고, 온 세상에 대해 각별한 하나님의 통치 이념과 국가관과 세계관을 정립해 가는 중요한 과정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 선택의 기로
광야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문앞에 둔 새로운 세대는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이 즈음 미디안 족속을 물리치는 승리를 획득했다. 이때는 거의 40년의 세월이 지나 광야에서 태어난 30-40대가 왕성한 전투력을 보유한 시대였다. 진군하던 이들이 요단강 동편을 지날 때 비옥한 땅을 발견하게 되자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루우벤과 갓 족속에게 질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요단 동편에서 가축을 키우고 그곳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모세에게 제안 하였다.
그러자 모세가 그들에게 “여러분의 형제들은 싸우러 가는데 여러분은 여기서 눌러 앉을 작정이오?(민 32:7) 어째서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낙심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합니까?”하고 책망했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 (53화) 성자와 현자의 차이
나실인은 거룩함의 특별한 법을 금욕주의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않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죽은 시체로 자신을 부정하게 하지 않아야하는 사람이다(민6:1-21). 그런 명시는 보통 3개월내의 한정된 기간동안만 시행되곤 했는데 예외가 있었다. 유명한 삼손과 사무엘같은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기적적인 특별함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나기 전 부터 나실인의 삶으로 약정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이것이 추천할 만하더라도 사람이 왜 이런 금욕적인 삶의 형태를 택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답을 하고 있지 않다.
1. 상반된 견해
우리가 나실인에 대해 일방적으로 경건하며,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유대인들은, 한편에서는 나실인들을 하나님께 ‘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한 쪽에선 그들의 경배의 삶의 마지막엔 그 역시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바쳐야하는 ‘죄인’이라고도 보았다. 탈무드의 역사 안에는 이러한 상반된 랍비들 사이의 불일치가 미쉬나시대, 탈무드와 중세 시대에도 오랜 동안 지속되 온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랍비 R 일라이져와 나중에 나흐마니데스에 따르면, 나실인들은 공경받을 만하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높은 경지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선지자 아모스도 (2:11)” 내가 당신의 아들 중의 몇을 하나님께 가까운 선지자와 같은 나실인을 키웠다” 고 말했다. 한편 일부에서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나중에 죄인으로서 속죄 제물을 바쳐야 했던 것은 결국 세속의 삶으로 돌아 갔기 때문이라고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지적한다. 그들의 죄는 결국 나실인에서 떠나는 것에 있었다고 R 엘리에저 하 카퍼와 슈미엘은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 (52화)] ‘이방인 열전’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시라아의 군대에 포위를 당하고 생존의 막바지에 이르른 때의 이야기이다. 식량은 떨어지고 물가는 치솟고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자신들의 자녀를 죽여 다른 가족들을 먹이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여성들은 급기야 왕에게 나아가 도움을 청하자 왕은 국가적으로도 방법이 없고 다만 하나님만을 기대하는 초조한 상황이 되었다.
1. 위기와 이방인
왕은 당시의 선지자인 엘리사에게 사람을 보내에 만약에 비책을 내놓지 못하면 목을 벨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엘리사는 왕의 비서관에게 내일이 되면 모든 상황이 변해 식량이 준비되고 밀가루가 싼 가격에 팔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비서관이 비웃으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 무시하자 엘리사는 “반드시 그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4명의 나환자가 등장한다. 그들은 늘 성밖에서만 살아야 했고, 더욱 식량이 떨어져 이 곳이든 저 곳이든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성안에 들어가 잡혀죽던 굶어죽던 가보자며 해질 녁, 시리아 성안에 들어오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곳엔 아무도 없고 이미 시리아 군대는 모든 음식과 옷과 금과 은을 내 팽개치고 황급히 도망을 간 상태였다. 나환자들은 실컷 먹고 마시고 금과 은도 마음껏 챙길 수 있었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 (51화)] “신의 진심”
유대교에서 기독교을 바라 보는 시각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유대교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은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이다라고 말한다. 신은 예수를 메시아로 이 땅에 보냈는데, 그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신이 선택한 민족이지만 벌을 내려 그들을 세상으로 흩어 버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옛 이스라엘’로 파기되고 새 이스라엘은 ‘기독교’로 대체되고 예루살렘은,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로 교체되었다는 일명 ‘대체 신학’이 판단의 근간에 있다고 보았다.
변환의 도래
기독교에서 부르는 ‘구약 성경’은 영어로 ‘Old Testament’로 ‘Old’는 말 그대로, 예전에 한 때 약속이 있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고 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의 구약적 방식이 아니라 신약의 방식으로 섬김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옛 선택된 백성’은 아브라함의 물리적 후손을 지칭하고, 그의 새롭게 선택된 백성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크리스천’인 것으로 간주한다.
역사학자이며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프랑스계 유대인 Jules Isaac은 이러한 신학적 원칙이 유대인들이 수세기 동안 팝박당하고 부랑아 취급을 받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의 글은 반향을 일으켰고 나중에 교황 요한6세가 궁극적으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에서 ‘Nostra Aetate(기독교와 유대교의 화해 선언)’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것은 가톨릭교회와 유대인의 관계의 커다란 변환을 가져왔다. Eugene Korn과 같은 랍비는 "이 선언은 모든 정통 랍비들이 '기독교와 유대교가 신학적 분쟁으로 일관하기 보다, 영적• 신앙적인 공통점들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50화)] ‘칭찬’에 인색한 탈무드?
크게 탈무드는 바빌로니안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의 두가지로 정리 될 수 있는데, 랍비들은 이상하리만치, 두 군데 탈무드에서 동일하게 ‘칭찬’에 대해서는 인색하다할 정도로 적게 쓰여져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을 ‘찬양’ 하라는 것과 사람들에게 ‘악담’ 말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군데 명백하게 기록해 두고 있다. ‘악담’의 대상이 사람들이고, 죄로 규정해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이라면, 과연 “사람에게 하는 ‘칭찬’은 ‘덕’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탈무드는 ‘칭찬’에 대해 인색한 것일까?”하는 질문을 유발 하게 한다.
1. 랍비 요나안 벤 자카이의 조언
요나안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사람을 키워내야 미래가 있다고 믿고 예시바를 세워 간 바리새파의 저명한 랍비이다. 많은 제자들 중 그에게는 다섯 명의 출중한 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제자들을 입이 닳도록 칭찬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제자 사랑은 탈무드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랍비 디미는 “어느 누구도 이웃에 대해서 ‘칭찬’을 하지말라. 이것이 결국 비판으로 이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에 대해서 라쉬는 두가지 설명을 덧붙이는데, 하나는 과한 칭찬은 당사자가 그 말에 맞도록 정당화돼야 하는 것과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그 사람의 결점을 찾아 비판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말은 도에 넘는 칭찬은 ‘진실하지 않은, 거짓’ 이라고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엄격한 인상을 주지만, 진실해야하는 것과 거짓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무게감을 싣고 있는 현자들의 지침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라쉬의 관점은 그 ‘칭찬’이, 과연 진실하고 정직한 것인지 또는 과장된 것인지에 따라 허락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면에서 랍비 자카이의 제자 사랑은 과장된 범주를 넘지않은 진실을 담고 있다고 후대의 랍비들은 평가했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49화)] ‘예사롭지 않은 땅의 의미 ‘
이스라엘이 1948년 다시 건국된 이래로, 수 천년 역사 가운데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속속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있다. 평생 살던 곳을 떠나 역이민을 하는 숫자가 늘고 있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민간과 협조해서 정착촌을 곳곳에 세우고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와 중국, 심지어, 구 소련 지역인 우크라이나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난민 자격으로 귀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나라이던 돌아오는 자국민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국가의 책임이라 할 수 있는데, 탈무드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야하는 특별한 이유를 토라로부터 명시하고 있다.
1. 땅을 더럽힌 결과
흔히 크리스천이나 이슬람이 개종을 하거나 세상을 정복해서 한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이유로 땅을 차지해야 한다면, 유대교가 땅을 차지 해야하는 이유를 중세의 지성인 나흐마니데스는 다소 의외인 레위기에서 그의 설명의 출발점을 찾고 있다.
“ (레 18:27)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레 18: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 말은 땅을 더럽히면 그 땅에서 너희를 쫓아 낼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시기와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이스라엘에서 더 살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에는 땅을 부패하게 만든 죄가로 인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듯 땅도 안식을 수행해야 했는데, 안식을 통한 회복과 성결의 계명을 성실히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의 결과인 것을 나흐모니데스는 상기 시킨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50화)] ‘칭찬’에 인색한 탈무드?
공교롭게도 제1성전이라 불리는 솔로몬 성전과 제2성전인 헤롯 성전이 무너진 날이 유대력 니산월(태양력3-4월) 9일로 동일하다. 유대인들의 종교, 문화,민족적 상징성을 모두 담고 있는 성전이 무너진 것은, 포로로 잡혀가거나 나라없이 나그네가 되어 세계를 떠 다니게 된 수치스런 고난의 역사를 의미한다. 이는 또한 국민과 주권과 영토의 상실로 인한 국가의 소멸을 말한다. 어느 국가든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역사의 이치이지만, 2000년동안 없어졌던 나라가 다시 세워지고 그들의 문화와 언어가 존속된 것은 세계사에 드문 일로 유대 민족의 지속성을 손 꼽는다. 이 민족은 오랜세월, 나라없는 설움과 핍박과 대량살상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 남게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한다.
1. 사라진 문명들
인류 학자들은 어느 문명이든 인식적 한계점에 도달하고 거대한 문화를 창출하지만 현재를 미래에 연결하지 못할 때 소멸돼 왔다고 지적한다. 남미의 마야 문명은 웅장하고 앞선 문명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현대에서 종족을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BCE 2600년부터 CE900여년까지 약3500여년 동안 존속했던 남미의 거대 문명이다. 그들은 그릇과 자기, 직물, 건축과 농업, 심지어 복잡미묘한 원형의 달력체계와 천문학, 기상에 대한 발전된 문명을 창출하였다. 자신들만의 문자와 수학적인 시스템도 갖추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농경을 유지할 저수지와 댐과 운하와 제방도 건설해 두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의 위대한 문명은 하루 아침에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많은 설들이 있지만 역사 학자들은 8-9세기 사이에 마야인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고 입을 모은다. 오랫동안의 가뭄과 인구과잉이나 서로를 죽이거나 전염병 또는 기근 등의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지만 지금까지 분명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35세기동안 오랫동안 존속된 문화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소멸된 것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 교육(47화)] ‘피를 멀리 하라’는 율법의 이유
언젠가 친구 랍비가 기독교인들은 언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었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토라의 뿌리를 같이하는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포교된 것을 잘 아는 지식에 기반한 질문이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 모두는 할례도 받고, 안식일도 지키고 다른 율법에 정한 절기를 성실히 잘 지키는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포교가 시작되자 이방의 비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일이 되자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같은 예수의 제자들이 여러 관련 사건들과 경위를 듣고 교회사에 획기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그것이 율법을 제하게 된 사건이었다(사도행전15장).
그래서, 그 때 이후로 기독교에서는 안식일과 할례, 절기를 지키는 일 등 모든 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었지만 그 중에 정말 심각한 몇 가지는 지키도록 남겨 두었다. 바로 우상 제물과 음행, 목매 죽인 짐승, 그리고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사도행전15:19-20)”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을 제하게 된 파격이 일어나게 되었지만 그 중 절대 폐할 수 없는 것 중에 특히 피를 멀리 하라는 것은 무슨 심각한 의미가 있는 지 궁금하다. 우리 음식 중에는 선지국같은 피와 관련된 음식도 있고, 한 때 노루의 피가 몸에 좋다고 농장을 찾곤하던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이에 대해 심각한 경고를 던지고 있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46화)] 죄와 속죄-죄의 다른 얼굴들
레위기를 보면, 제사를 지내던 고대 시대에는 죄에 대한 속죄의 법도가 다양하고 복잡했다. 양이나 염소, 비들기와 동물을 잡아 피를 뿌려서, 죄와 속죄에 대한 확연한 법조항이 토라에 깨알처럼 적혀 있으니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적어도 외형적 죄의 문제는 법적인 해결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심코, 우연하게 범법하게 된 실수에 대해서도 속죄를 받도록 굳이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다양하다. 죄의 규명과 죄의 구명에 대해 탈무드는 죄에 대해 세가지 측면이 있다고 가르친다.
1. 죄의 세얼굴
첫번째로 죄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한다고 조언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졌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면 죄책감을 갖게 된다.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례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워 가리고 숨은 모습이다.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과거와 달리 하나님 앞에 속 시원히 나올 수 없었다. 그들은 “부끄러워서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고 , 동산에 거니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 얼굴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기3:8-9)” 라고 기록하고 있다. 벌거벗은 것이 심히 부끄럽고, 죄책감으로 당당히 나설 수 없어 숨은 것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45화)] 너무나도 어려운 ‘제사법’
설날(구정)엔 고향을 방문하고, 성묘도 하고 가정에 따라 조상에게 제사도 지낸다. 아직도 전통적인 예법을 고수하는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곳일수록 제사상을 차리는 법이 까다롭고 복잡하다. 현대의 젊은 세대들이 이해되지 않는 예법에 대한 불만이 도전적이지만 그만큼 가문의 전통을 중시하고 조상에 대한 예법을 고수하려는 의지가 세대를 거듭해 명맥을 잇고 있다. 성경(토라) 가운데 가장 기피하려는 책이 있다면 ‘레위기’일 것이다.
그 이유는 제사와 예법에 관한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정신 차려 읽는다고 하다가 금세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그저 막연히 공식을 대하 듯 기계적으로 읽게 되는 루틴에 빠지게 된다. 가장 솔직한 이유는 잘 이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 많은 율법과 제사법을 어떻게 이해 하고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 많은 법들을 빼곡히 적어 기록하도록 한 신의 의도는 무엇일까?
1. 젊은 세대의 도전
매 세대마다 유대인들 스스로, 현대에 굳이 이 많은 법들을 지켜 먹는 것과 제사법을 지켜야 하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가정에서 흔히 들을만한 질문이고 특히, 친구들이 가족 이상으로 중요한 사춘기의 아이들은, 이 여러 성가신 법들을 지키지 않겠다며, 반발을 한 사례들도 분명 많이 있을 법하다. 세상과 다른 삶의 패턴을 지키는 것도 이미 다른 사람의 눈총을 받을 만한데, 게다가 자신 스스로도 불편한 것을 감수해야 하니 부모의 요구가 더욱 비호감일만 하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44화)] 신년의 덕담 - ‘용서’
구정을 맞이 하며 우리 모두는 분주하리만큼 카톡과 우편으로 새해 인사를 받는다. 새해를 맞으며,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변치 않는 전통이 아닐 수 없다. 새해가 되면 으레, 각 개인, 가정 또는 회사와 단체의 미래를 향한 거창한 출사표를 던진다. 하지만 실제 복을 받기에 처해진 현실이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 될 때때로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의 불편을 경험하곤 한다. 탈무드는 새해에, 변화와 축복과 행복을 꿈꾸는 출발점에 부담스런 ‘용서’를 덕담으로 전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1. 용서
탈무드 학자들은 창세기에 드물게 등장 하는 ‘용서’의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기근으로 곡식을 구하러 왔다가 형제들을 만나 오랜 앙금을 풀고 용서하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이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요셉의 책략으로 동생 베냐민의 곡식자루에서 총리의 은잔이 발견되고 베냐민이 포로로 잡히게 되고 모두가 죽게 될 처지가 되자 유다가 나서 자신이 기꺼이 종으로 잡히고 동생을 자유롭게 풀어주고자 하는 구명 운동에서 요셉은 유다의 변화를 확인하게 된다. 동생을 팔아 넘기는 주모자 였던 22여년의 세월을 지나 변화한 것을 보고 요셉은 그제서야 자신의 정체를 속 시원히 밝히고 상황은 반전을 맞이한다.
요셉은, 그 때 형제들에게 왜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고 종으로 팔아 넘겼는지, 보디발의 종이되고 심지어 감옥에 투옥된 일들에 대한 것을 따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심지어 애굽에 자신이 오게 된 것은 형들의 책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위로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죽고난 후에도, 혹시나 자신들에게 앙심을 풀지 않고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창세기50장19-20)”고 말하고 있다. 요셉은 더 이상 이 사건이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탈무드는 요셉이 억울함과 고난을 경험하고 도달한 용서의 결론은 “용서 받는 자보다 용서하는 자를 더욱 높인다”는 원리를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유대인의 탈무드와 자녀교육(43화)] ‘하나님의 대안, 안식일’
모세가 종살이를 하던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고 시내산에 당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 다음 단계의 아젠다가 무엇인지 알려주기를 원했다. 그것은 나라를 통치해 가기 위해 십계명과 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모세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소식이 감감해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민원이 많아지자 산 아래 있던 모세의 형 아론은 중재자이며, 평화주의자답게 그들의 요청대로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하고 안심하는 우상이 되었지만, 급기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고, 모세는 깊은 산중으로부터 하나님이 돌 판에 직접 쓴 십계명을 들고 내려 오다가 화를 못이겨 돌판을 집어 던져 깨지고 말았다.
1. 여전한 우상
랍비들은 이 사건을 현대처럼 팽배한 배금주의가 그 시대에도 비싼 금으로 만들어진 우상으로 인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심리가 작동한 것이라 분석한다.
토라는 부를 추구하는 것에만 몰입하면 자신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현자들은 요나의 이야기처럼, ‘부’는 마치 하루 저녁에 호황을 누리게 하다가, 느닷없이 다음 아침에 사그라져 죽어버리는 넝쿨과 같다고 말한다. 흔히, 돈이 다스릴 때 우리는 쉽게 물건의 가격은 기억하지만 그 가치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집 값은 폭등하거나, 주식 값이 솟을 때도 있지만 공황이 오기도 하고 주식이 곤두박질치면 뉴욕의 굴지의 회사들도 도산하는 사례들도 즐비하다.
유대인들에게 집은 두가지 면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건물이다. 탈무드는 “가정은 심장이 없는 세상 속의 천국이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가정은 매일의 삶에서 시적 운율을 배우는 곳이며, 배려와 친절로 사랑의 언어를 창출하는 곳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집을 가정의 개념보다도 이윤이 창출되는 자본 투자라고 생각하고 이런 경우, 가정의 가치는 값에 비해 훨씬 쉽게 두번째 순위로 전락하고 만다.
[금요단상] ‘신의 이름으로’
주 중에 ‘이스라엘과 함께’라는 슬로건으로 호주 유대인 커뮤니티가 준비한 대중 모임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며칠 전 팔레스타인의 극단 이슬람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가을 명절인 장막절이 끝나는 안식일에 5천여발의 로켓을 쏘고 수백명의 무장 테러 공습을 감행해 이미 1000여명이 넘는 이스라엘 사망자와 2000여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 때문이다.
1. 안식일의 공격
이스라엘 남부 지역에선 음악 축제에 모인 젊은이들을 낙하산을 탄 하마스 무장대원들이 내려와 무차별 사격으로 260여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붙잡아 머리채를 휘어 잡고 옷을 벗겨 나체로 질질끌며 오토바이나 트럭에 태워 인질로 잡아갔다.
도처에서 살상이 일어나고, 유아들이 40명이나 한꺼번에 죽고 임신한 여인의 배를 찔러 태아와 함께 죽이는 일과 외국인들을 포함해 150여명이 넘는 인질이 잡혀갔다. ‘알아크사 홍수’라는 작전명으로 전개된 끔찍한 살상은, 유대인의 안식일에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기획되고 실행되었다.